“자유리.
사람들이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갑작스러운 신의 질문에 잠깐 생각에 빠져본다.
글쎄. 귀찮아서 일까? 힘들어서 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다 나는 신에게 대답을 했다.
“글쎄요. 음..뭔가 귀찮아서 그런거 아닐까요?”
“귀찮아서? 네..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말이죠. 크리에이터들의 ‘감정’상태가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해요.”
“심리요?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때문에 콘텐츠를 못 만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콘텐츠를 만들지 않는 이유의 9할 그 이상이 제작자의 감정 문제로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정말 콘텐츠에 대한 주제를 못잡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신은 내 말을 듣고 일말의 표정 변화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유리. 사람들이 시간여유가 많고, 주제가 확실하다면 정말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 것 같나요?”
“뭐,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 없는 상태보다는 좀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아무리 조건이 보장되어있어도 그 사람의 감정상태에 따라 콘텐츠의 생존은 엇갈릴 것입니다. 감정은 자유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작용을 합니다.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서 내면의 모든 것들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 감정이 가진 속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니 감정이 시키는데로만 사는것이지요. 그런데도 자신은 이성의 힘을 통해 통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때문에 만들지 않은 콘텐츠를 이성적으로 포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합리화’라고 하지요.”
“합리화요?”
“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꼭 합리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이성적인것 그 자체는 문제 될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합리화 과정을 통한 결론이 매번 콘텐츠 제작의 중단과 포기로 가는경우라면 이성적인 포장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는 이유가 기술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문제들을 많이들 이야기해요. 장비가 마땅치않아서, 이게 제대로 사람들에게 통용되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공간이 시끄럽고 마땅치 않아서.. 이런식으로 환경의 탓을 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결국 이 모든 원인이 콘텐츠를 만드는것이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시작되는 것이 많아요. 콘텐츠의 욕망이 떨어지니 콘텐츠 만드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인정을 하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에요.
‘감정 때문에 흥미가 없어서 콘텐츠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사실 자기 자신의 방향을 의심하는 꼴이 되기에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니 주변에 있는 사실들을 기반으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콘텐츠를 누가 보겠어. 해보니 반응이 없어. 이런식으로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합니다.”
“흠. 그렇군요. 그럼 콘텐츠가 감정이 원인이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합리화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네. 콘텐츠가 주는 선물이 해결해줍니다.”
“콘텐츠가 선물을 준다구요? 그게 무슨말인가요? 콘텐츠를 만들면 해결이라도 된다는 것인가요?”
“네. 맞습니다. 콘텐츠를 만들면 내 감정이 명확해집니다. 한마디로 내가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다보면 굉장히 정확해진다는 것이지요.”
“그걸 만들면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까?”
“네. 콘텐츠를 만들면서 자신이 생각해온 착각을 노골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싫어하는 것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꾸준히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싫어하는 것도 만들어야 하나요? 그건 일종의 노동 아닌가요?”
신은 나의 불쾌함을 미리 알고 있는듯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거갔다.
“네. 맞아요. 하지만 싫어한다는 것 또한 머리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저는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야기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속에서 여러가지를 깨닫게 되겠죠.
‘아.. 내가 이런것을 싫어하는 구나. 아.. 내가 이런 점은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부분이었네.’
콘텐츠를 만들면서 자기를 스스로 관찰해주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지요.”
“재밌네요. 콘텐츠가 자기 관찰이 되는 열매라는 것. 그럼 신도 콘텐츠를 만들어 가면서 알게된 것인가요?”
“네. 콘텐츠를 만들어가면서 저를 관찰하며 알게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수년간 무자본 사업을 통해서 사람들을 창업시키고, 그 간의 수천명의 회원들을 관리하고 일선에서 그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한가지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말할때,
실제로 관찰하지도 않은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구나’
해외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많이 가본적 없는 사람은 막상 오래 여행을 떠나보면, 외지에서 낯선 경험이 꼭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런 맥락이 콘텐츠에서도 같다는 사실이에요.
영어를 좋아해서 콘텐츠를 만들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영어가 좋아서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다보면서 하나둘 자신이 정말 영어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더군요. 영어공부는 좋아하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과정은 안좋아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영어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콘텐츠를 퉁쳐서 말하기가 쉽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라고 이야기 하시는거군요.”
“맞아요.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지만 그런 세부적인 것들을 찾게되지요. 처음에는 시간이 좀 오래걸릴지 모릅니다만 계속해서 콘텐츠를 만들어가보면, 아 네가 좋아하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차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인지단계의 핵심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보면서 닥치고 만들어보는 것, 불편함을 주는것이 어떤 요소인지 영상인지 글인지 이미지인지.. 나는 어떤 채널이 편한지를 알아가고, 주제를 다양하게 도전해보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면서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보고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해보는 것. 이렇게 넓은 과정을 거칠 수 있어야만 인지 단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지요.”
“결국.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콘텐츠 과정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변화를 꾸준하게 관찰해가면서 콘텐츠의 주제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나요?”
“맞습니다. 결국 그게 자유리의 콘텐츠를 더 오랫동안 만드는 비법이 되어 갈 것입니다.”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신과의 대화속에서 나는 나의 콘텐츠를 돌아본다.
뒤적거리다가 실패한 수많은 흔적들.
구독자 100명이 채 안되는 수 많은 유튜브 채널들.
매일 올리기 귀찮은 블로그의 잔재들.
영상화 작업이 어려워 실패한 글의 상처들.
나는 ‘콘텐츠’라는 새로운 분야를 두드리면서 정말 수도 없이 주제를 바꿔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변덕으로 인해 자괴감이 들기도 하며, 꾸준하지 못한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것들을 깨달아가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이 유리한지.
세부적인 주제는 어떤 것이 좋을지.
나는 글이 유리한지. 영상이 유리한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이 아니라 콘텐츠의 지속적인 제작을 통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중이었다.
한가지 한가지의 지속적인 변화의 바닥에는 ‘성공’이라는 아름다운 텃밭이 존재하지 않았다. 질퍽하고 반복되는 실패의 땅 속에서 나는 실마리 찾듯 나를 관찰하며 그렇게 콘텐츠의 열매를 키워나가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생산된 콘텐츠의 흔적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듯이.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나를 알아가기위해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신과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동시에 내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하는 이유가 점점 더 명확해져갔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나는 나를 더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